가브리엘 드 폴리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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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브리엘 드 폴리냑은 18세기 프랑스 귀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신이었다. 루이 16세 치하에서 베르사유 궁정에 들어가 여왕의 총애를 받으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 망명길에 올랐으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을 거쳐 사망했다. 폴리냑 가문은 혁명 이후 몰락했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모나코 대공 가문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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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드 폴리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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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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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폴리냐크 공작부인 |
본명 | 욜란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
다른 이름 | 폴리냐크 공작부인 |
출생일 | 1749년 9월 8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파리 |
사망일 | 1793년 12월 9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
배우자 | 쥘 드 폴리냐크 (1767년 결혼) |
자녀 | 아글레 드 폴리냐크 아르망 드 폴리냐크 쥘 드 폴리냐크 카미유 드 폴리냐크 |
아버지 | 장 프랑수아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
어머니 | 잔 샤를로트 에로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프랑스어 표기 | |
가문 | |
가문 | 폴라스트롱 가문 |
2. 생애
파리에서 폴라스트롱 후작 가문의 딸로 태어나, 1767년 폴리냑 백작 쥘과 결혼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눈에 들어 가장 총애하는 측근 중 한 명이 되었다. 왕비의 총애를 바탕으로 폴리냑 백작 부인과 그녀의 가문은 막대한 부와 특권을 누렸으며, 남편은 공작 작위를 받기도 했다. 폴리냑 가문에 대한 연금과 하사금은 연간 50만 리브르에 달했고, 이후 70만 리브르까지 늘어났다. 이러한 과도한 특혜는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오노레 미라보는 "다사스 가문은 나라를 구한 공으로 1000 에큐, 폴리냑 가문은 나라를 멸망시킨 공훈으로 100만 에큐!"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폴리냑 공작 부인과 그 가족은 왕족과 측근들 중 가장 먼저 국외로 망명했다. 그녀는 망명지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1793년 사망했다.
그녀의 자녀 중 차남 쥘은 왕정복고 시대에 프랑스 총리가 되었으나 반동 정책으로 7월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남 메르시오르(카미유)의 후손 피에르는 모나코 대공 루이 2세의 장녀 샤를로트와 결혼하여 레니에 3세를 낳았고, 이로써 폴리냑 가문은 현재 모나코 대공 가문의 남계 조상이 되었다.
2. 1. 출생과 가문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은 루이 15세 치하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 프랑수아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첫 부인인 잔 샤를로트 에로 드 보클레송이었다.[40] 당시 귀족 자녀들의 관습에 따라 여러 세례명을 받아 요랑드 마르틴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주로 마지막 이름인 가브리엘로 불렸다.[41] 친가인 폴라스트론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였으나, 가브리엘이 태어날 무렵에는 빚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42]아버지는 남프랑스 랑그도크 지방의 누에유(Noueilles), 브네르크(Venerque), 그레피악(Grépiac) 영주였다.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 가계가 어려워지자 가족은 영지가 있는 남프랑스 랑그도크의 누에유 성으로 이주했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인 앙드로 백작 부인 마리 앙리에트 드 폴라스트론의 손에서 자랐다. 이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1767년 7월 7일, 17세의 나이로 쥘 드 폴리냑 백작과 결혼했다.[43] 남편의 가문인 폴리냑 가 역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나 재정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 남편 쥘 드 폴리냑 백작의 주요 수입은 그가 소속된 제1 용기병 연대(1er régiment de dragons)에서 받는 봉급 4,000 리브르였다.[44]
2. 2. 결혼과 베르사유 입성
1767년 7월 7일, 17세의 나이에 쥘 프랑수아 아르망 드 폴리냑 백작과 결혼했다.[43] 폴리냑 가문 역시 유서 깊은 명문가였으나, 가브리엘의 친정인 폴라스트론 가문처럼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다.[42] 남편의 주 수입원은 제1 용기병 연대에서 받는 봉급 4000리브르가 전부였다.[44]1775년, 가브리엘은 남편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공식 리셉션에 참석했다. 이는 궁정 시녀가 된 올케(혹은 의붓 여동생) 디안 드 폴리냑의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거울의 방에서 열린 이 리셉션에서 가브리엘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가브리엘을 처음 보자마자 즉시 "매료"되었고,[10][48] 그녀에게 베르사유 궁정에 영구적으로 머물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정에서의 생활은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남편에게 궁정 생활을 유지할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고 솔직하게 답했다.[11][49] 새로운 총애하는 이를 곁에 두고 싶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가문이 가지고 있던 많은 빚을 갚아주고, 가브리엘의 남편에게 왕실 마굿간 관리 책임자라는 수입이 좋은 직책을 마련해주었다.

왕비의 아파트 근처에 거처를 마련한 가브리엘은 곧 왕비와 가까운 인물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특히 국왕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친구가 되었다. 루이 16세는 가브리엘이 아내에게 차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들의 우정을 지지했다.[12][13][50][51]
하지만 가브리엘의 급부상은 궁정 내 다른 인물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왕비의 고해 신부 베르몽 신부와 왕비의 정치 고문이자 주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사인 메르시-아르장토 백작은 강한 적대감을 보였다. 메르시 백작은 왕비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왕실의 총애가 한 가족에게 이토록 압도적인 이점을 가져다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라고 쓰며 폴리냑 가문에 대한 특혜를 비판했다.[14][52]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가브리엘은 빠르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배타적인 사적 모임, 이른바 '프티 카비네(petit cabinet)'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다. 그녀의 동의 없이는 이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15][16][53][54] 그녀를 따르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우아하고 세련되며,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17][55]
폴리냑 가문 전체는 왕비의 파격적인 후원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그들의 늘어나는 부와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은 궁정 내 다른 귀족 가문들의 분노를 샀다. 폴리냑 가문에 대한 왕비의 지나친 편애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부 귀족들과 파리 시민들에게 인기를 잃게 되는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8][56]
2. 3.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신
1775년, 올케인 디안 드 폴리냑의 초대로 남편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열린 공식 리셉션에 참석했을 때, 가브리엘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름다운 가브리엘에게 즉시 매료되어[10][48] 그녀에게 베르사유에 영구적으로 머물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정 생활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가브리엘은 남편의 수입으로는 궁정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솔직하게 답했다.[11][49] 새로운 총신을 곁에 두고 싶었던 왕비는 폴리냑 가문의 많은 부채를 해결해주고 남편에게 수입이 좋은 관직(왕비 마구간 관리 책임자)을 마련해주었다.
궁정에 자리를 잡은 가브리엘은 왕비의 아파트 근처에 거처를 마련받았다. 그녀는 왕비와 친밀했던 국왕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 아르투아 백작과도 친구가 되었으며, 왕비에게 차분한 영향을 미치는 그녀의 존재를 고맙게 여긴 루이 16세 역시 둘의 우정을 지지했다.[12][13][50][51] 하지만 가브리엘의 등장은 기존 왕실 측근들의 반감을 샀다. 특히 왕비의 고해 신부 마튜 자크 드 베르몽 신부와 왕비의 정치 고문이자 오스트리아 대사인 플로리몽 클로드 드 메르시 아르장토 백작은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메르시 백작은 왕비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왕실의 총애가 한 가족에게 이토록 압도적인 이점을 가져다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14][52]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가브리엘은 곧 왕비의 사적인 모임인 "프티 카비네"(petit cabinets프랑스어)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고, 그녀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웠다.[15][16][53][54] 그녀는 많은 친구들에게 세련되고 우아하며, 매력적이고 즐거운 사람으로 평가받았다.[17][55]
폴리냑 가문 전체는 왕비의 막대한 후원으로 엄청난 부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의 늘어나는 재산과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 그리고 궁정 내에서의 영향력은 기존 귀족 가문들의 질투와 분노를 샀다. 폴리냑 가문에 대한 왕비의 지나친 편애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부 귀족들, 특히 파리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8][56] 오노레 미라보는 이러한 특혜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신랄한 풍자를 남겼다.
> "다사스(Nicolas-Louis d'Assas)의 가족에게는 나라를 구한 공로로 1000에퀴, 폴리냑의 가족에게는 나라를 망친 공로로 100만 에퀴!"

1780년은 폴리냑 가문에게 최고의 해였다. 가브리엘의 장녀 아글라에 드 폴리냑은 12살의 나이에 프랑스 최고 귀족 중 하나인 그라몽 공작가의 후계자 기슈 공작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위해 국왕이 하사한 지참금은 80만 리브르라는 거액이었고,[57] 신랑에게 국왕이 하사한 토지가 70만 두카트 상당의 가치가 있었기에 궁정에 충격이 흘렀다. 같은 해 5월, 가브리엘이 차남 쥘 드 폴리냑을 출산하자, 9월 20일 남편 쥘은 왕가의 축하 속에 폴리냑 공작 작위를 받았다.[58] 이로써 가브리엘은 폴리냑 공작 부인이 되었고, 이는 궁정 사람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1780년대 후반에는 가브리엘과 왕비가 레즈비언 관계이며 트리바디즘과 같은 성행위를 한다는 내용의 음란물 팸플릿 수천 개가 유포되었다. 이러한 주장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19][20][21][59][60][61] 당시 부르주아와 도시 노동 계급 사이에 퍼져 있던 동성애에 대한 혐오감과 맞물려 왕실의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22][62]
일부 역사가들은 가브리엘의 사치에 대한 비난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녀가 베르사유에서 14년간 쓴 비용이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이 1년 동안 쓴 비용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23][63]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성적 문란에 대한 비난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녀가 냉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상냥한 말투와 완벽한 매너 뒤에 가십과 음모를 즐기는 성격을 숨겼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에서 가브리엘을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 "맹트농 부인이나 퐁파두르 부인조차도 천사 같은 눈빛의 총애, 얌전하고 온순한 폴리냑만큼 돈을 쓰게 하지는 않았다. [폴리냑 가문에 대한 총애라는] 이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을 뿐... [왕비의] 손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은, 보라색 눈을 가진 여자, 아름답고, 조용한 폴리냑 부인이었다."[24][64]
엘리자베스 드 페이도(Élisabeth de Feydeau) 역시 그녀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역사가 중 한 명이다.[25]
1782년, 왕실 자녀들의 양육 책임자인 '왕가의 가바네스'(Gouvernante des Enfants de France프랑스어)였던 게메네 공작 부인이 남편의 파산 스캔들로 사임하자, 왕비는 그 후임으로 가브리엘을 임명했다. 왕위 계승자를 양육하는 중요한 직책을 폴리냑 가문과 같이 상대적으로 평범한 가문 출신이 맡는 것은 격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 인사는 또다시 궁정 귀족들의 큰 반발을 샀다.[70]
새로운 지위와 함께 가브리엘은 베르사유 궁전 내에 13개의 방으로 구성된 아파트를 받았다. 이는 통상 4~5개의 방이 배정되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파격적인 특혜였다. 또한 그녀는 1780년대에 프티 트리아농 부지에 조성된 왕비의 전원풍 휴식처인 왕비의 촌락 내에 별장을 받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결혼 생활은 당시 귀족 사회의 정략결혼과 마찬가지로 남편과의 정서적 교감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남편의 먼 친척이자 근위대 대위였던 조제프 이아생트 프랑수아 드 폴 드 리구, 보드뢰유 백작(Comte de Vaudreuil프랑스어)과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가브리엘이 베르사유에 온 이후 낳은 두 아들의 실제 아버지가 보드뢰유 백작이라는 추측도 있었다.[71] 그러나 가브리엘과 보드뢰유 백작의 관계가 실제로 연인 관계였는지, 아니면 플라토닉한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72] 엘레나 마리아 비달(Elena Maria Vidal)과 같은 일부 작가들은 플라토닉 설을 지지하기도 한다.[73]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는데, 관계가 끝난 후 서로 파기했거나 정치적 이유로 은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74] 가브리엘은 왕비가 보드뢰유 백작을 점차 싫어하게 되자,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그를 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1785년경, 노르망디 공작(훗날의 루이 17세)을 출산한 이후 왕비는 보드뢰유 백작의 무례함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가브리엘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되었다.[75] 왕비의 시녀장 앙리에트 캉팡 부인에 따르면, 왕비는 폴리냑 가문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며 "군주가 자신의 궁정에서 총신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에게 대항하는 또 다른 폭군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71]
왕비의 총애가 식었다고 느낀 가브리엘은 영국으로 여행을 떠나 친구들을 방문했는데, 특히 런던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었던 데본셔 공작 부인과 가깝게 지냈다.[76] 영국 체류 중 그녀는 허약한 모습 때문에 "리틀 포"(Little Po영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 4. 외모
현존하는 초상화 대부분에서 그녀는 아름답게 묘사된다. 루이즈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이 그린 초상화 속 모습은 "갓 수확한 향긋한 과일 같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7][45] 그녀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과 매우 창백한 흰 피부를 가졌으며, 특히 라일락색 혹은 제비꽃색으로 묘사되는 드문 색의 눈동자가 특징이었다.[8][46]당대의 기록들을 종합한 한 현대 역사가는 그녀의 외모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상을 주는 젊은 미모"로 요약하며, 풍성한 검은 머리, 큰 눈, 오뚝한 콧날, 진주처럼 빛나는 치아는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평가했다.[9][47]
2. 5. 프랑스 혁명과 망명

1788년 9월 14일, 반군주제 시위가 재개되었고, 10월 시위대는 불꽃놀이 비용을 요구하며 마차를 탄 사람에게 앙리 4세에게 경례할 것을 강요하고, 폴리냑 공작 부인을 묘사한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이후 군대가 투입되어 그레브 광장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며 군중을 해산시켰다.[35]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직전 몇 달 동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부인의 관계는 다시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정치적으로 폴리냑 부인과 그녀의 친구들은 베르사유 궁정 내의 극단적인 왕당파 운동을 지지했으며, 부인은 여름이 진행되면서 왕당파의 음모에서 점점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보통 국왕 루이 16세의 막내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협력했다. 외교관 봉벨 후작은 폴리냑 부인이 혁명에 맞서 강경한 대응을 끊임없이 촉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56][77] 그녀는 봉벨 후작의 정치적 스승인 브르퇴유 남작 및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혁명파에게 인기가 있는 재무 총감 자크 네케르를 파면하도록 국왕을 설득해야 한다고 왕비를 설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군사적 지원 없이 네케르를 해임한 것은 파리에서 심각한 폭력을 촉발시켰고, 이는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공격으로 절정에 달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폴리냑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망명길에 올랐다. 분노한 파리 민중은 폴리냑 일족의 살해를 요구했다. 폴리냑 부인은 베르사유에 남기를 원했지만, 왕비의 설득으로 7월 16일 밤 가족과 함께 베르사유를 떠났다.[78] 루이 16세의 특별 명령에 따라 아르투아 백작과 브르퇴유 남작도 떠났다. 가브리엘은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가서 편지를 통해 왕비와 연락을 유지했다. 마차를 탈 때 받은 왕비로부터의 전갈에는 당장의 생활비 대신 500 루이 금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가 있었다. "안녕, 소중한 친구. 무서운 말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쓸 수밖에 없어요. 말을 붙이라는 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제게는 이제 당신을 껴안을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79][80] 가브리엘이 떠난 후 왕실 아이들의 보살핌은 투르젤 후작 부인에게 맡겨졌다.
하인으로 변장한 가브리엘은 도피 행각 중 상스에서 마부에게 정체가 발각되는 등 위험한 일을 겪었지만[78], 무사히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 후 그녀와 가족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서신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연락을 유지했는데, 이를 통해 그녀의 거주지를 추적할 수 있다. 폴리냑 가족은 스위스, 토리노, 로마, 베네치아(1790년 3월에 장남의 결혼식에 참석)를 거쳐 1791년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1791년 6월의 바렌느 도주 사건 당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국경 지대에서 국왕 일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1791년 7월에는 코블렌츠의 프로방스 백작 망명 궁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수많은 귀부인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81] 1792년의 발미 전투 후에 이 망명 궁정이 해산되자 다시 빈으로 돌아왔다.
가브리엘은 스위스 체류 시 이미 병을 앓고 있었고, 그 후 수년간 거의 틀림없이 병과 싸웠다.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직후인 1793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족은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사인을 암이었다고 결론 내렸지만, 왕당파 역사가들만은 사인은 결핵이었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의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여전히 아름다운 폴리냑 공작부인의 영혼을 데려가기 위해 죽음의 천사가 내려오는 모습을 그린 다양한 풍자 팜플렛에는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이른 죽음은 적어도 초기 팜플렛에서는 구체제의 종말을 비유하는 은유가 되었다. 그 이후의 가족 서신에서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은 매우 강조된 부분이었다.
2. 6. 왕실 가정교사
1782년, 프랑스 왕실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던 게메네 부인은 남편의 파산 스캔들로 인해 사임했다.[26][70] 왕비는 그녀의 후임으로 가브리엘을 임명했다. 이 임명은 가브리엘의 사회적 지위가 (차기 왕을 기르는) 그 직책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폴리냑 가문과 같은 평범한 가문의 사람이 맡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궁정 내에서 큰 반감을 샀다.[26][70]새로운 직책에 따라 가브리엘은 베르사유 궁전 내에 13개의 방으로 구성된 아파트를 받았다. 이 특권 자체는 궁정 에티켓의 범주에 속하는 조치였지만, 13개라는 방의 수는 항상 인구 과밀 상태였던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이전 왕실 가정교사들은 보통 4개에서 5개의 방이 있는 아파트에 거주했다. 가브리엘은 또한 1780년대에 프티 트리아농 부지 내에 조성된 왕비의 전원풍 은둔소인 왕비의 촌락(Hameau de la Reine) 안에 자신만의 별장(코티지)을 받았다.
2. 7. 자녀
(Aglaé Louise Françoise Gabrielle de Polignac프랑스어)(Armand Jules Marie Héracle de Polignac프랑스어)
(Jules, prince de Polignac프랑스어)
2. 메리 샤를로트 파킨스 (Mary Charlotte Parkyns영어, 1792–1864)
(Camille Henri Melchior de Polignac프랑스어)
(Marie Charlotte Calixte Alphonsine Le Vassor de La Touche프랑스어, 1791–1861)